세상에는 결과가 중요한 일이 있지만 과정이 더 중요한 일도 있다. 나는 사람 간의 관계를 쌓는 일에서는 결과보다 과정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느라 결과에만 치우쳐서 과정을 경시하기 마련이지만, 사람 간의 관계 형성에서는 내가 상대방과 어떠한 과정을 거쳐가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더라도 대화의 결론이 어떻게 되었느냐보다는 그 대화 속에서 상대방의 단어, 목소리, 감정, 표정 등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여행을 가더라도 여행지가 좋았는지 별로였는지보다도 그곳까지 가는 여정에서 생긴 일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야구장 직관을 다녀왔다. 어렸을 때부터 야구 보는 걸 좋아해서 야구장 직관도 일년에 서너번씩 다녀오곤 했다. 야구장이란 장소는 단순히 야구 경기를 보러가는 것 이상의 경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수만명의 사람들 모두 공 하나를 지켜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의 공유, 그리고 같은 팀을 응원하는 수만명의 팬들과 응원가를 다같이 떼창하면서 울리는 함성들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그래서 야구장은 혼자서든, 친구, 연인, 가족 등 어떤 사람들과 가더라도 하나로 융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토요일에 사전투표를 하고 왔다. 투표할 때 비례대표 정당 투표용지의 길이를 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정당은 4~5개에 불과한데 40개나 달하는 정당들의 이름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생각해보면 '나'라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맞닿아있는 면적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즉 내가 알던 세상은 우물 안 개구리정도의 식견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 또한 너무 피곤한 일이다. 그럴 땐 머리 아프게 모든 사람들을 다 이해하려 들 필요 없이 그저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구나' 하면서 넘어가면 된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었던 2009년 이후로 줄곧 한화이글스의 15년차 팬이다. 최근 10여년간 한화이글스는 최하위권에 머무르는 심각한 암흑기를 거쳤다. 그리고 매년 새 시즌 개막할 무렵이면 '올해는 다르다' 라는 설레발을 치다가 또 다시 최하위로 떨어지는 모습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하지만 이번 시즌은 정말 심상치가 않다. 아직 10경기밖에 치르지 않는 시즌 초반이기는 하지만 현재 순위는 1위이다. 15년동안 2018시즌 1번을 제외하고는 가을야구를 본 적이 없는데 제발 이번 시즌만큼은 다르기를 기대해본다.
나는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피하지는 않지만 혼자 지내는 시간을 더 중요시 여기는 편이다. 그에 반해 사회생활에서는 성격이 완전 딴판이다. 감정표현도 적극적으로 하고 사람들과 최대한 많이 얘기하면서 어울리는 걸 좋아한다. 상반되는 두 성격이 한 사람 안에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내성적인 성격은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고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속으로 감정을 삭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스스로의 내성적인 면이 너무 싫었고, 무엇보다 내성적인 성격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의 나와는 다른 자아를 연기해야 했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자아상인 페르소나를 만들어서 연기한다. 실제 성격..
최근에 두 번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하나는 고등학교 같은 반으로 만나서 현재까지 만나는 10년 지기 친구의 결혼식, 다른 하나는 5개월 전에 이직한 직장의 동료 결혼식이었다. 지금껏 가본 결혼식은 가족과 친척의 인맥으로 간 게 전부인데 순전히 나의 인맥으로 간 결혼식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두 번의 결혼식은 공교롭게도 모두 어린 나이에 올리는 결혼식이었다. 내 친구는 당연히 동갑이고, 직장동료도 나보다 1살 많을 뿐이다. 20대 중후반에 결혼하는 것이니 꽤 빨리 하는 편에 속한다. 남의 결혼식을 보다보니 자연스레 미래의 나의 결혼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결혼이란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의 과정이다. 그래서 어른이 될 준비가 된 사람만이 결혼을 할 수 있고, 결혼을 해야만..
2020.01.17 - [일기] - 224. '다음에 보자'는 말에 대해 4년 전에 나는 '다음에 보자'는 말이 주는 불확실함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의 나도 어느새 '다음에 보자'는 말만 내뱉고 실천하지는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2년 남짓한 사회생활을 경험하면서 스쳐 지나가는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나도 결국엔 '다음에 봅시다' 말만 되풀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선 '나도 어쩔 수 없구나' 하는 현타가 찾아왔었다. 원래 사회생활이 다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변명을 둘러대면서 과거에 했던 '나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했던 다짐도 결국엔 무색해지고 말았다.
내 발 사이즈는 262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서 260 신발을 신기에는 작고 265를 신기에는 좀 크다. 이런 애매한 발 사이즈 때문에 항상 신발을 고를 때면 260을 사야하나 265를 사야하나 고민에 빠진다. 둘 중 어디에도 딱맞게 소속되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야할 지 갈팡질팡 하기 마련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상황에 따라 260과 265신발을 둘 다 신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에 모든 일들이 나에게 딱 맞게 들어맞기는 힘든 일이다. 어떨 때는 자신을 욱여넣기도 해야하고 어떨 때는 헐렁하더라도 꾹 참고 걸어가야 하기도 한다.
나에게는 기묘한 징크스가 하나 있다. 비가 올락말락할 날씨에 외출하려고 할 때 내가 우산을 들고 나가는 날에는 비가 오지 않고, 들고 나가지 않는 날에는 비가 온다는 징크스이다. 안정적으로 생각했을 때 항상 우산을 들고 나간다면 최소한 손해볼 일은 없겠지만 나는 괜히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음으로써 나의 운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우산을 들고 나간다는 말은 결국엔 걱정에 사로잡혀 있어서가 아닐까?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을 때, 비가 오지 않으리라는 자신의 낙관적인 직감을 한번 믿어보고 싶을 순간이 있다. 지금까지 성공률이 낮기는 해도 성공했을 때의 느껴지는 쾌감은 워낙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