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왔다. 나는 예전부터 지브리 영화를 좋아했었는데, 오래간만에 개봉한 작품이라 기대를 품고 관람하려고 했다. 다만 관람 전에 이 작품에 대한 관람객들의 평가가 극명히 갈렸다. 대체로 줄거리가 난해하다는 이유로 낮은 평점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사실상 지브리의 마지막 작품이 될 지도 모르는데, 괜히 안좋은 기억으로 남게되지 않을까 망설였다. 한편으로는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의리도 있는데 작품이 어떻건 일단 내눈으로 보고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정말 인상깊게 보았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왜 지브리의 작품을 좋아할까를 스스로 되물어보았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노노케 히메'는 어렸을 때 얼핏 봤던 기억이 나지만 또렷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생각이 나서 이번 기회에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원작기준) 무려 1997년에 개봉한, 나랑 동갑인 영화이다. 개봉한지 26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 역시도 이번에 이 영화를 보고나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모노노케 히메'의 전체 줄거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원한과 증오'이다. '산'과 재앙신은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을 증오하고, 에보시와 마을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들개를 증오한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증오가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갈수록 희생자만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
나는 종이 상자를 들고 마당에 나가 그 위에 식용유를 뿌리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상자는 훨훨 타오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은 것들이 재로 변하기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바람 진 날이어서, 하얀 연기는 지면에서 곧장 여름 하늘로 피어올랐다. 연기가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구름 위까지 뻗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였다. 그 연기를 따라 죽죽 올라가면, 저 위쪽에 나의 과거가 다같이 모여 즐겁게 사는 조그만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태엽 감는 새 2권, p.299) "아저씨는 아저씨 나름으로 열심히 싸우고 있어요. 타인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요. 안 그렇다면 왜 굳이 우물 속에 들어갔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물론 태엽 감는 새 아저씨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구미코씨를 찾기..
소설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저 이 소설은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전한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시대에는 아이를 낳을 때 더 이상 모체수정을 할 필요 없이, 모든 아이는 시험관수정을 통해서 태어나게 된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알파,베타,감마,엡실론 등 사람의 계급과 신체적 외형, 앞으로 하게 될 일이 모두 정해진 채로 태어나고, 정신적인 사고 역시 태어나거나 어렸을 때부터 주입되어 자라난다. 또한 슬프거나 화나는 감정이 생기면 지금의 마약 역할을 하는 ‘소마’를 섭취함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고 행복함만 느끼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당연시 여겨지는 일들이 그 시대에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고, 지금으로서 당연하지 않은 일들이 당연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어머니’라는 용어가, 시..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 무라카미 하루키 저 어쩌면 반 아이들에게 그녀(시마모토)란 존재는 지나치게 냉정하고, 늘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처리할 줄 아는 아이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개중에는 그 같은 그녀의 자세를 차갑고 오만하다고 여기는 아이들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시마모토의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따뜻하고, 쉽게 상처 받기 쉬운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드리워진 그런 그림자를 나는 그녀의 말과 표정 속에서 문득문득 엿볼 수 있었다.(p.12)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 무라카미 하루키 저 저는 '아키가와 마리에는 내 친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품은 채, 남은 생을 살아갈 생각입니다. 그애가 성장하는 모습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요. 가령 그애가 제 친딸임이 밝혀진다 해도 저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상실감만 더 통절해질 따름이지요. 만약 그애가 친딸이 아니라면 그것도 그것대로 다른 의미에서 깊은 실망을 불러올 겁니다. 혹은 좌절해버릴지도 모르지요. 어느 쪽으로 흘러가건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리라는 전망은 없습니다. (중략)...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유일무이의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벽에 걸린 그애의 초상화를 매일 바라보며 그 안의 가능성을 곱씹는 일이다 - 정말 그 정도로 괜찮으신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흔들림..
소설 『1Q84』 - 무라카미 하루키 저 "인간은 시간을 직선으로 인식해. 길고 반듯한 막대에 눈금을 새기는 것처럼. 이쪽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 이 뒤는 과거, 그리고 지금은 이 포인트에 있다, 라는 식으로. 알겠니?"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은 직선이 아니야. 어떤 모양도 갖고 있지 않아. 그건 모든 의미에서 형태를 갖지 않는 것이야. 하지만 우리는 형태 없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으니까 편의상 그걸 직선으로 인식하지. 그런 관념적인 치환이 가능한 건 현재로서는 인간뿐이야." (중략) "즉 시간을 영원히 지속되는 일직석으로 인식하고 그런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행동해왔어.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에 딱히 불합리한 점이나 모순점을 찾아낼 수 없었어. 그러니까 경험칙으로서 그건 아마 옳을거야...
도카이 의사에 관해 또 한 가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있다. 무슨 얘기 끝에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는 언젠가 나에게 여자 전반에 대한 한 가지 견해를 밝혔다.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어떤 거짓말을 언제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모든 여자는 어느 시점에 반드시, 그것도 중요한 일로 거짓말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로도 물론 거짓말을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 아무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대부분의 여자들은 얼굴빛 하나, 목소리 하나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 몸의 독립기관이 제멋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
"넌 이제 잠을 자는 것이 좋겠어"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거야."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하,p.457, '해변의 카프카'의 마지막 문장) 벌써 3번째 하루키 소설이다. 내가 하루키의 소설만 읽는 것은 아니고 지난 번의 썼던 '다자키 쓰쿠루~' 와 이번에 쓸 '해변의 카프카' 사이에 다른 작가의 소설 2편은 더 읽었는데, 읽고 나서 딱히 감상 글을 써야겠다는 필요성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에 반해서 이 작품을 포함해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 3편은 읽는동안, 그리고 다 읽은 직후에 드는 생각은 '나중에 다시 읽어봐야겠다'와 '감상 글을 적어야겠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
지난 번에 읽었던 '상실의 시대'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 하루키의 작품이다. '상실의 시대'를 워낙 인상깊게 읽었고, 동시에 하루키의 다른 작품은 어떨까하는 호기심이 생겨서였다. 마찬가지로 책의 선정 기준은 딱히 없었다. 유독 제목이 길어서 눈에 띄어 더 강한 호기심을 자극한 것 같았다. 일단 사람에게서 '색채가 없다'라는 표현도 신박했고, 그가 순례를 떠났다고 하니 아무 근거없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추측을 했다. 책을 다 읽고나서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이 작품도 역시 재미있고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상실의 시대'와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하루키의 생생한 묘사와 스토리는 그대로였다.과거에 '나'(다자키 쓰쿠루)가 친하게 지내던 그룹에서 추방당했는데, 당시의 '나'는 아무런 이유도 전해듣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