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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이제 잠을 자는 것이 좋겠어"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잠을 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을거야."

이윽고 너는 잠이 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하,p.457, '해변의 카프카'의 마지막 문장)


벌써 3번째 하루키 소설이다. 내가 하루키의 소설만 읽는 것은 아니고 지난 번의 썼던 '다자키 쓰쿠루~' 와 이번에 쓸 '해변의 카프카' 사이에 다른 작가의 소설 2편은 더 읽었는데, 읽고 나서 딱히 감상 글을 써야겠다는 필요성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에 반해서 이 작품을 포함해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 3편은 읽는동안, 그리고 다 읽은 직후에 드는 생각은 '나중에 다시 읽어봐야겠다'와 '감상 글을 적어야겠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 꼭 훌륭한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것은 다른 작가의 작품들보다는 그의 소설은 읽으면서 마음의 밑바닥부터 흔들어대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상 글은 그 무언가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한 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우선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은 내가 태어나서 읽었던 단일 작품 중에서는 가장 길이가 긴 소설인 것 같다. 상,하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합치면 약 900페이지가 될 것이다(확실히 완독한 작품의 수가 늘어가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작품의 길이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독특한 전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홀수 장에서는 '나'인 다무라 카프카에 대한 내용이고, 짝수 장에서는 나카타 노인에 대한 내용이 전개된다. 처음에 그 둘은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처럼 전개되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공유하고 연결되는 지점이 생긴다. '입구의 돌'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무라군은 열다섯 살의 소년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을 두고 떠나간 일에 대해서 원망스러움과 좌절감을 느꼈다. 아버지와의 관계 또한 원만치 않아 결국 가출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가출의 여정 속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리기도 한다. 한편 나카타 노인은 어린 시절에 정신적 충격을 받고 오랜 시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지만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 지적 장애를 앓게된 사람이다. 그래서 국가의 지원금을 받고 있지만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부업으로 다른 사람의 고양이를 찾아주는 일을 한다. 이렇듯 나카타 노인의 삶은 줄곧 남에게 의지하는 수동적인 삶이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그림자가 희미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니 워커를 살해한 뒤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는 한편, '입구의 돌'을 찾기 위해서 본인의 인생에서 처음 주체적으로 나서게 된다. 또 다른 등장인물로서 '까마귀 소년'이 있다. 그는 실제 인물이 아닌 다무라의 또 다른 자아이다. 까마귀 소년은 다무라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면서 앞으로 본인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따금 까마귀 소년이 등장해서 카프카와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다무라군의 두 자아간의 내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그 때문인지 다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에 굴복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다. 아니 '굴복하지 않는다'라는 표현보다는 '피할 수 없다'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초반에 서술된 모래 폭풍 이야기가 이를 암시한다. 참고로 이는 까마귀 소년이 다무라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가는 국지적인 모래 폭풍과 비슷하지. 너는 그 폭풍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방향을 바꾼다. 그러면 폭풍도 네 도주로에 맞추듯 방향을 바꾸지. 너는 다시 또 모래 폭풍을 피하려고 네 도주로의 방향을 바꾸어 버리지.(중략)그 폭풍은 그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중략)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거야. (상,p.17,19)

이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집은 나간 다무라군은 버스 안에서 누나로 추정되는 사쿠라를 만나고, 도서관에서는 엄마로 추정되는 사에키상을 만난다.



이 작품은 총 두 번 읽어 보았다. 이 작품의 경우 후반부에 반전이 심어져있기 때문에 그걸 모른 상태에서 처음 읽었을 때와, 알고 난 뒤에 두 번째 읽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소설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그 반전에 대한 암시가 조금씩 드러나기는 하지만, 초반부만 하더라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읽어보니, 처음 읽었을 때는 지나쳤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대목들이 은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가령 버스 안에서 사쿠라를 만났을 때 다무라는 속으로 '이 사람이 나의 누나였으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품고 사쿠라상을 만났을 때가 그렇다. 그리고 나카타 노인과 다무라군의 이야기가 대칭적으로 전개된다. 두 이야기 모두여정의 과정 중에서 조력자(호시노, 오시마)를 만나게 되고, '입구'를 발견하게 되고, 나카타 노인과 사에키상은 죽음을 맞이한다. 나카타와 다무라는 서로 긴밀한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다. 다만 그 중간의 지점에서 사에키상(그리고 오시마상)만이 두 명 사이를 매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꼽은 이 소설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다무라군이 숲 속에서 발견한 (입구 안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소녀 시절의 사에키와 중년의 사에키를 모두 만난 것이다. 소녀 시절의 사에키를 만난 당시의 다무라군은 그녀에게 현혹되어서 계속 그 마을에 계속 머무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년의 사에키가 다무라군에게 당장 이 곳을 떠나서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라고 부탁한다. 고민 끝에 다무라군은 중년의 사에키의 말을 듣고 원래의 세계로 복귀한다. 이 장면이 곧 소설의 전체 주제의식을 함축하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다무라는 과거와 현재의 대립 속에서 현재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고, 과거의 사건(어머니가 자신을 떠나간 일)을 용서하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사에키상이 죽고 다무라군이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본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아마 숲 속에서의 사건을 겪은 뒤 그토록 바라던 터프해진 모습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이런 다무라군의 모습과 상반되는 인물이 사에키상과 나카타 노인이다. 세 명 모두 어린 시절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결과 사에키상에게는 과거만 남게 되어서, 지금 살아가는 현재까지도 과거의 기억을 투영하며 살고 있다. 반대로 나카타 노인은 과거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고 빈약한 기억력때문에 현재의 단편적인 정보만 기억이 가능하여 오직 현재만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삶의 필름의 일부분이 끊겨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이 만나서 얘기를 나눈 후,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사에키상이 얘기했던 '기다리고 있었던 열차'는 현재의 삶으로 대변되는 나카타 노인이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서로의 결핍된 부분이 충족됨으로써 (비록 결과가 죽음이긴 하지만) 삶의 완결성을 매듭지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다무라군은 두 사람과 달리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현재와 미래를 향해 내딛었다는 점에서는 능동적인 인물상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결부시켜서 볼 만한 포인트는 다무라가 머물렀던 '숲'이라는 장소이다. 숲은 도서관에 다무라의 자리를 만들기 전까지 오시마가 데려다 준 오두막을 둘러싸고 있다. 나는 숲의 정체가 실제로는 다무라 자신의 무의식 세계이고, 숲 속의 한가운데에 있는 오두막은 의식 세계라고 생각했다. 다무라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숲 깊숙이 들어가보기를 시도하지만 길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멀리 가지 못한다. 다무라가 숲 안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는 행위는 곧 자신의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는 행위에 상응한다. 처음에는 얼마 깊숙이 못 들어가고 다시 돌아온다. 이는 자신의 무의식의 방어 체계에 막혀서 저지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에게 추적을 당해서 두 번째로 오두막에 왔을 때는 이전보다 더 대담하고 깊숙이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갖고 왔던 모든 도구를 버리고 맨몸으로 숲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때부터는 불안감이나,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했던 대상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기 스스로였다. 오이디푸스의 예언처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할 것이라는 바로 그 예언말이다. 따라서 숲에 대해서 공포를 느낄지, 무덤덤하게 대할지는 자신한테 달려있던 것이다. 그렇게 걸어 가다가 두 명의 군인을 만나는데, 그 군인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안내해준 입구와 그 내부는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과거와 현재가 총망라된 자신의 무의식의 집합체이다. 그 안에서 만난 소녀의 사에키는 자신이 버려졌던 과거를 대변하고, 중년의 사에키는 현재와 미래의 삶을 대변한다. 그 곳에서 다무라는 과거인 '소녀' 대신에 현재인 '중년'을 선택함으로써, 어린 시절에 자신이 품었던 어머니를 향한 원망과 증오를 모두 씻어내고 용서를 택한 것이다. 다무라가 그토록 바라던 진정한 '터프한 소년'은 자기 안에 잠든 과거의 어두움을 빛으로 비춤으로써 어두움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용서와 화해를 채움으로써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아마도 네 속에 있는 공포와 분노를 극복하는 일일 거야" 하고 까마귀 소년이 말한다. "거기에 밝은 빛을 집어넣어서 네 마음의 차가워진 부분을 녹이는 거지. 그것이 진짜로 터프해지는 거야. 그렇게 해야 비로소 너는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될 수 있어." (하, p.304)


"네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거야. 그녀가 그때 느꼈던 압도적인 공포와 분노를 이해하고, 너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거야. 그것을 계승하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꿔 말하면, 너는 그녀를 용서 해야만 해. 그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렇게 해야 헤. 그것이 너한테는 유일한 구원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외에 구원은 없어." (하, p.327~328)

"내가 다무라 군에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뿐이야" 하고 사에키상이 말한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를 기억해 주는 것. 다무라 군만 나를 기억해 준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잊어도 괜찮아."(하,p.404)





작품의 해석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와 똑같다건만, 맞아도 백 번 맞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다무라처럼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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