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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기사단장 죽이기』 - 무라카미 하루키 저

 

저는 '아키가와 마리에는 내 친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품은 채, 남은 생을 살아갈 생각입니다. 그애가 성장하는 모습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면서요. 가령 그애가 제 친딸임이 밝혀진다 해도 저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상실감만 더 통절해질 따름이지요. 만약 그애가 친딸이 아니라면 그것도 그것대로 다른 의미에서 깊은 실망을 불러올 겁니다. 혹은 좌절해버릴지도 모르지요. 어느 쪽으로 흘러가건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리라는 전망은 없습니다. (중략)...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유일무이의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벽에 걸린 그애의 초상화를 매일 바라보며 그 안의 가능성을 곱씹는 일이다 - 정말 그 정도로 괜찮으신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흔들림 없는 진실보다는 오히려 흔들릴 여지가 있는 가능성을 선택하겠습니다. 그 흔들림에 제 몸을 맡기는 쪽을 선택할 겁니다."  『1권 p.467~468』

흔들림 없는 진실보다는 흔들릴 여지가 있는 가능성...비단 소설속의 멘시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우리에게도 가끔 확실치 않는 가능성이 더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일은 지독히 부조리하고 지독히 비정한 처사처럼 느껴졌다. 분노는 없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무엇을 상대로 화를 낸단 말인가? 내가 느끼는 것은 기본적으로 마비의 감각이었다. 다시 말해 정신의 모르핀 같은 것이다.
『1권 p.526』

 

문득 동생의 손을 떠올렸다.(중략)...
우리 사이에는 확연한 생명의 교류가 있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내어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얻었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 제한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교류였다. 이윽고 엷어져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기억은 남는다. 기억은 시간에 온기를 줄 수 있다. 그리고 - 잘되면 말이지만 - 예술은 그 기억을 형태로 바꾸어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
2권 p.122

 

현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엷어져 사라져간다. 하지만 기억은 이미 엷어져버린 과거를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해준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뭔가 무거운 개인적인 비밀을 감추고 있어. 당시 혼자 품고 세상에서 천천히 퇴출하려 하지. 마음속 깊은 곳에 튼튼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는 버렸든가 다른 어딘가에 감췄어. 어디였는지 당신도 이제 기억나지 않는 곳에 말이야." 2권 p.310

 

아마다 도모히코는 계속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여전히 엷은 막 같은 것이 씌어 있었다. 그것은 생과 사 사이를 천천히 가로막아가는 얇은 레이스 커튼처럼 보였다. 커튼이 몇 겹씩 겹쳐지고, 점점 그 너머가 보이지 않게 되다가, 마지막에는 무겁고 두툼한 장막이 내려오는 것이리라. 2권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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