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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에서 '다음에 보자'는 말만큼 막연한 말이 또 있을까. 그 말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헤어지면서 예의상 건네는 말처럼 굳어버렸다. 나와 상대방의 재회의 불확실성을 대충 '다음에 보자'는 말을 통해서 틀어 막는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다음에 보자'는 말에서 '다음'의 주기가 길어진다. 풀어서 얘기하자면,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앞으로의 더 '먼 훗날'을 기약할 수 있게 된다. 나이가 어린 조카들만 보더라도 일년에 명절날 하루 이틀 만나는 조카들은 헤어질 때가 되면 서운해하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옛날에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조카 중 하나였겠지). 아무래도 10년밖에 살아오지 않은 아이에겐 인생의 10분의 1이나 되는 시간을 기약하는 것은 무리일테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시간에 비례해서 앞으로 다가올 시간도 더 멀리 기약할 수 있는 능력도 성장하는 것 같다.

인간 관계라는 것도 결코 영원할 수는 없으며, 몇년마다 주기적으로 갱신해야 하는 여권의 유효기간처럼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유효기간이란게 존재해서 일정 주기마다 갱신을 해줘야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학교 친구들이 인간 관계에 대부분인 초중고 시절에는 딱히 유효기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오늘 안 본다해도 내일 볼 수도 있고, 내일 못 봐도 다음주 언제쯤에는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초중고 시절에는 인간관계의 유효기간을 늘리는 연습을 충분히 해두지 못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오자 그동안 나와 얽혀있던 인간관계의 틀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친구들마다 학교가 갈라지고, 사는 지역도 갈라지다보니 기존의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래서 그들과의 만남은 '인위적'으로 주선하지 않는 이상 만나기라는 불가능했다. 친구와의 만남을 '인위적'으로 주선해야 한다는게 나에게는 너무 낯설었다. 그동안 나에게 친구들이란 '자연스럽게' 만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유효기간을 늘리는 연습도 충분히 못한 나에게는 이러한 친구들과의 분리는 20대 초반의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친구가 되었건, 학교 선후배건, 알고 지내는 사람이건간에 '다음에 보자'는 말은 나에게 불확실한 재회의 가능성을 안겨다준다. 상대방에게 '다음'이란 정확히 얼마 후를 말하는 걸까? 나는 항상 '다음'이라는 단어의 막연함에 대해 불만과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방이 얘기하는 '다음'의 유효기간 안에 이미 나의 유효기간은 만료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다음'만 기약하다가 이미 떠나가버린 사람들도 여럿 있다. 그런 사람들을 굳이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욕심이라는 것도 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았다. 결국 우리는 어느 누구를 만나건간에 카운트다운은 시작된다. 카운트다운이 0이 되기 이전에 유효기간을 갱신해야만 관계가 만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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