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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 무라카미 하루키 저

 

 

어쩌면 반 아이들에게 그녀(시마모토)란 존재는 지나치게 냉정하고, 늘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처리할 줄 아는 아이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개중에는 그 같은 그녀의 자세를 차갑고 오만하다고 여기는 아이들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시마모토의 그런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따뜻하고, 쉽게 상처 받기 쉬운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드리워진 그런 그림자를 나는 그녀의 말과 표정 속에서 문득문득 엿볼 수 있었다.(p.12)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눈에 띄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꽂힌 문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랜 동안 그녀에게 내 마음속의 특별한 부분을 열어두었던 것 같다. 마치 레스토랑의 구석진 조용한 자리에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살며시 세워놓듯이 나는 그녀를 위하여 그 부분만은 남겨놓았다. 시사모토와 만나는 일은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p.30)
"넌 분명 머릿속으로 혼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거겠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걸 눈치 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거야. 그건 어쩌면 너가 외아들이기 때문인지도 몰라. 넌 혼자서 많을 것을 생각하고 처리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는 거야. 너 자시만 알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는 거야(중략)
이즈미가 나를 외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을 때 그녀는 응석받이로 자라 버릇없는 아이에 대한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 나의 고립된 자아에 대하여 얘기한 것이다. (p.61)

이 문장을 읽으면서 멈칫하게 된 이유는, 아마 나를 너무 잘 표현하는 문장 때문이라서 그런 것 같다.

 

 

 

어쩌면 그 힘(흡인력)을 향수 냄새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중략)
어떤 냄새는 100명 중 50명을 끌어당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100명 중 한두 사람만을 매우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냄새도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것은 특별한 냄새다. 그리고 내게는 그와 같은 특별한 냄새를 뚜렷이 감지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이 나를 위한 숙명적인 냄새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그녀들의 곁에 다가가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난 알 수 있어, 하고.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고. (p.66)
그녀는 어느 쪽이냐 하면 얼굴 모습은 평범한 편이었다. 적어도 가는 곳마다 남자들이 다가와 말을 거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속에서 확실하게 나를 위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좋아했다. 나는 만나면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곤 했다. 나는 그 속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사랑했다.(p.106)
"너를 보고 있으면 때때로 먼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라고 나는 말했다. “그 별은 무척 밝게 보이지. 하지만 그 빛은 몇 만년이나 이전에 보내진 빛이거든. 그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천체의 빛인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 빛은 어떤 때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실적으로 보이지.”(p.264)

 

 

하지만 그 봉투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내가 인식하고, 내 의식속에서 그 부재와 존재가 명확히 뒤바뀌고 나자, 봉투가 존재한 사실과 더불어 존재했을 현실감도 마찬가지로 급속히 상실되어 갔다. (중략)
이를 테면 어떤 사건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현실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 기억과 감각은 너무나도 불확실하며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우리가 사실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실인가를 식별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을 현실로 붙들어두기 위해서 그것을 상대화할 또 다른 현실을 -인접하는 현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따로 인접해 있는 현실 역시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 있게 상대화하기 위한 근거를 필요로 한다. ,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또 다른 인접한 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연쇄가 우리 의식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고, 어떤 의미로는 그것이 이어지는 것으로 그들 연쇄가 유지되고,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가 성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p.313)

이 구절을 읽고서 '어쩜 이렇게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서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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