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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181. 일탈

4-so 2019. 6. 4. 03:34

 

오늘은 월요일이다. 자체 휴강을 때리기에 딱 알맞은 요일이다. 자휴를 하는 날에는 무얼 할까나, 고민을 하다가 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개연성도 인과성도 없이 그냥 바다에 가고 싶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바다를 매우 좋아했던 것 같다. 고향이 바닷가도 아니고 어렸을 때 많이 가본 적도 없는데 바다에만 가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얀 백사장과 푸른 바다가 이뤄내는 극적인 대조와 규칙적으로 찰랑거리는 파도소리를 보고 듣고있자면 잠시 이 세상에서 벗어난 듯한 착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나에겐 그런 힐링이 필요했던 것 같다.

 

목적지는 강릉의 안목 해변으로 결정했다. 당일치기로 갔다 올 것이기 때문에 너무 먼 곳은 무리였다. 현재 거주지에서 강릉까지 버스로 (편도)3시간 가까이 소요되기 때문에 생각보다 그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빡빡하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만 했다. 일부러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계획을 세우는 순간부터 오늘의 일탈은 일탈이 아니게 된다. 오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다를 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몇시에 출발하고 도착하건, 얼마를 지불하건, 무엇을 먹건은 부차적인 문제였고 그런 문제들 때문에 바다에 가는 행위자체가 퇴색되어서는 안된다. 오늘은 진정으로 내가 하고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속으로 그리는 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직접 행위로 옮기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오전 일찍 집에서 출발해서 강릉터미널에는 12시 30분에 도착하여 시내버스를 타고 약 1시쯤에 안목 해변에 도착했다. 계획없이 떠난 것 치고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해변에 도착하여 내 시야에 백사장과 바다의 수평선이 채워지는 그 순간은 정말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에 왔기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 아무런 계획 없이 스쳐 지나가는 생각만으로도 내가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된 나의 변화에 스스로도 대견했기 때문이다. 도착은 했지만 뭘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백사장으로 저벅저벅 걸어가서 모래와 바다의 경계 지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약 1분동안 멍을 때리면서 파도가 오고 가는 것을 지켜봤다.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의 기분은 너무 행복했다. 남들은 수업을 듣고 있을 때 나는 수업을 째고 바닷가에 와서 좋았고, 바닥에 깔린 뜨거운 모래와 대조적으로 머리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좋았고, 5시간동안의 핑계댈 거리가 있는 게으름이 보장되어서 좋았다. 그렇게 약 5분간의 뭉클했던 바다와의 상봉은 뒤로하고, 역시 아무런 정보도 계획도 없이 그냥 눈에 띄는 식당으로 가서 끼니를 해결했다(나중에 검색해봤더니 그 곳이 꽤나 유명한 식당이었다). 

안목 해변은 카페 거리로 유명한데 해안선을 따라 약 200미터 정도의 일직선 도로에 대형 카페들이 줄지어서 10개 넘게 들어서있다. 대형 자본이 침식한 관광 명소의 문제점은 잠시 잊기로 하고 카페에 들어가 바다 뷰가 보이는 자리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이번에도 바다를 보면서 한동안 멍을 때렸다. 모래 위에 점처럼 찍힌 사람들과 그 위에 바다, 그 위에 푸른 하늘, 그 속을 비행하는 갈매기들이 이뤄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 글은 블로그를 개설한이래로 가장 자유로운 마음에서 쓰는 글일 것이다. 그렇게 대략 3시간동안 멍때림과 글쓰기를 반복하다가 5시쯤에 카페를 나와서 다시 백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사장에 털썩 앉아서 또 다시 멍한 눈빛으로 바다를 응시했다. 휴대폰 카메라에도 몇 장 담았지만 내 눈으로 1초라도 더 즐기는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사람 구경도 한다. 평일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도 놀랍지만 연령층도 다양했다. 내 나이 또래 20대들이 가장 많은 것 같았고 나보다 더 어려보이는 학생들이나 중년, 노년층, 외국인까지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은 왜 평일부터 해변에 와 있을까 속으로 분석해본다. 나처럼 즉흥적인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일까, 휴가를 내고 온 것일까, 나처럼 수업을 째고 온 사람도 있을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들은 모두 나처럼 바다가 주는 해방감에 저마다 짊어지고 있던 속세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념에 30분동안 잠긴 후에야 집에 다시 돌아가야할 시간임을 깨닫고 왔던 길로 돌아왔다.

 

오고 가는데만 왕복 8시간이 걸리고 그 곳에 머무른 시간은 4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효율성을 따지자면 세상 미련한 일탈이지만 오늘만큼은 나에게 효율성, 계획성, 합리성은 평가 항목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냥 실천에 옮겼다는 것 하나만으로 오늘의 여정은 완벽했다. 오늘을 계기로 이런 일탈이 더 대담해지고 더 즉흥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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