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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내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고보니 '안녕하세요 고객님'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보험사, 카드사, 통신사'의 가입권유 전화라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평소대로라면 바로 '죄송합니다'하고 끊어버리는데 이번엔 그러질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받아본 가입권유 전화 중에서 처음으로 '남자'가 건 전화였다. 대개 이런 권유 전화는 99프로가 여자 상담원이 전화를 하는데 남자가 말하는 건 처음이어서 신기하면서도 당황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남자 상담원의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광고에서나 나올법한 성우의 목소리였다. 나긋나긋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도도 너무 급하지도 않으면서 답답하지도 않은 속도로 계속 할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기계적으로 말하길래 사람이 아니라 기계 목소리인가 싶었는데 중간에 호흡이 들어가는 걸 보니 사람인 건 확실했다. 물론 그 사람에게는 전화는 나 말고도 수십, 수백명한테 똑같이 늘어놓았던 메뉴얼화 되어있는 멘트여서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읊었겠지만 아무튼 난 설명을 듣는 동안 계속 넋이 나가있었다.
그렇게 약 5분동안 그 사람은 자기 할말만 하고 나는 중간중간에 '끊지 않고 잘 듣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으로 '네,네,네'만 반복하고 있었다. 대충 끊을 타이밍을 간봐야 하는데 이 사람이 너무 청산유수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나도 하염없이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 분의 영업용 멘트가 다 끝나가서 약간의 정적이 흐를 때 쯤에야 겨우 '죄송합니다'하고 끊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 사람에겐 나처럼 도중에 끊어버린 사람이 대부분일테니 별 신경도 안 쓸 수도 있다. 차라리 끊을거면 받자마자 바로 끊는 게 나은 건가? 난 어차피 끊을거면서 왜 5분 넘게 그 사람 말을 듣고 있었을까. 내가 그 사람의 시간을 뺏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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