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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0. '대학생'이 된다는 것

4-so 2019. 9. 3. 02:54

얼마 전에 책상을 정리하다가 내가 고3 때 쓴 메모를 하나 발견했다. 그 메모는 수능이 끝나고 대학생이 되면 꼭 하고 싶은 일들을 적은 일종의 '대학생 버킷리스트'였다. 적힌 리스트 중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낸 것도 있고, 이루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전까지는 대학생이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는데, 막상 대학생이 되고 나니 김 빠진 탄산마냥 싱거운 일들이었다. 메모에 적힌 내용을 통해서 내가 대학생 생활에 어떤 기대를 걸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당시 대학생이란 이미지는 억압당한 욕구들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존재였다. 나는 특별한 목적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공부 빼곤 뭐든 하고 싶었고,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대상으로서 대학생을 선택한 것이다.

나의 초중고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인상은 오묘했다. 길거리에서 대학교 이름이 박힌 과잠을 입고 돌아다니는 대학생들만 보면 나는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아무래도 학창 시절의 가장 큰 숙원 사업은 대학교 진학이다 보니, 이미 그런 사업을 이뤄낸 나의 인생 선배들을 보면서 느끼는 부러움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공부보다는 놀고 싶었던 나(뿐만 아니라 아마 전국의 모든 학생들)에게 어른들은 오래된 격언처럼 말씀하시던 '대학생이 되면 뭐든 할 수 있다' 라든지, '대학교 가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같은 다소 허황된 말로 나(우리)를 유흥으로부터 떼어내려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싱거운 격언이 탐탁지는 않았으나, 마땅히 반박할 도리는 없었으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공부에 전념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런 말을 수없이 듣고 자란 내가 벌써 대학생 3학년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뭐든 다' 하고 있을까? 과연 현재의 나는 예전의 내가 기대했었던 나의 대학생 생활에 부응하고 있을까?

 

나는 재수라는 큰 산을 넘어 20살이 되어서야 그토록 기대하던 대학생이 되었다. 내가 예전부터 원했던 대학교의 간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들이 어느정도 알아주는 대학교에는 진학했고 실패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첫 학기의 개강 일주일 전부터는 하루하루가 설레면서 '나의 대학생활은 어떨까?' , '다른 대학생들은 어떤 모습일까?' 등의 떨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대학교 첫날의 캠퍼스 광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쉬는 시간만 되면 캠퍼스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사람들과, 저마다의 개성을 최대한 발산하려는 듯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들. 그전까지 정제되고 정돈된 사람들의 외양들만 봐온 나에게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 같은 캠퍼스의 생동감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이런 튀는 사람들이 캠퍼스 안에서 만큼은 '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튐'은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는 암묵적으로 용인된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느꼈던 대학교의 첫인상이었다.

처음에는 대학교 생활이 많이 낯설었다. 단순히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진학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매일같이 만나던 반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같은 개념이 사라지고 사람마다 각자 다른 시간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인지 학생의 존재를 그 전까지 강조되었던 '공동체 구성원 중 하나'에서 대학교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으로서 인정을 해주는 분위기였다. 이런 점과 이어지는 얘기로 중고등학교보다 대학교는 학교가 제공하는 울타리가 낮아졌다. 중고등학교는 대부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많은 학생들이 대학진학이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바라보면서 운영되고, 학교 입장에서도 많은 학생들을 대학교에 진학시키길 원하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공통된 지향점이란게 흐릿해졌다. 대학생이 된 사람들은 각자 본인의 노선을 향해서 걸어나간다. 따라서 학교에서도 학생에게 최대한 자율을 보장해준다. 본인이 쉬고싶을 때는 휴학을 할 수도 있고, 본인이 원하는 수업만 골라 들을 수 있고, 수업에 결석해도 아무도 닦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울타리가 낮아짐이 무조건 자율성만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이를 감수할 만한 책임감도 동반되어야 한다. 대학생은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다.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성년이다. 이제 본인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게 대학생이 되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대학생 저학년 때는 대학생이라는 위치가 매력적이었다. 남들에게 더 이상 어린애 취급은 받지 않으면서 어른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고나니 오히려 이게 애매해졌다.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려도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고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서서히 다가온다. 예전의 나는 대학교 3학년쯤 되면 성숙한 어른이 되어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대학교 입학한 지 2년 된 학생이라는 느낌이다.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회로 다가가고 있다. 아니, 사회가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 썩 달갑지는 않다.

나는 대학생이 되면 어른들이 얘기했던 그 조언처럼 뭐든 다 알아서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대학은 절대 알아서 되는 곳이 아니었다. 무엇이든지 자기 스스로 챙기고 신경써야한다. 내가 처음 대학교에 들어와서 애를 먹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초중고 시절에는 담임선생님이 말씀해주시거나 같은 반 친구들끼리 공유되는 정보들이 많아서 딱히 정보의 빈부격차를 느껴본 적이 없었지만 대학교는 달랐다. 일단 유동되는 정보의 양이 방대할뿐더러 지인을 통하지 않고서는 접하기도 힘든 정보들도 많았다. 누가 '대학교 때는 알아서 된다'는 낭설을 퍼뜨렸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대학생이 된다는 것만큼 설렜던 적이 또 있을까, 그리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 느꼈던 실망보다 더 큰 실망이 있을까. 내 삶에서 대학생은 단순한 신분의 한 종류가 아니라, 10대 시절의 기대와 야심이 투영된 존재였기에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클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에 들어오기 위해서 나는 수능이라는 큰 시험 하나만 보고 달려왔는데, 수능이 끝나고 대학교에 와보니 아무 것도 차려진게 없었다. 대학교는 그림이 완성된 도화지가 아닌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도화지였다. 내가 지금껏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어떤 도화지에 그릴 지를 정하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많은 대학 신입생들이 이러한 입학 전과 후의 온도차이를 느꼈을 것이다. 수능만 보고 대학교에만 들어오면 내 인생은 그걸로 끝일 거라는 생각은 입학 한 달만에 얼마나 허무한 공상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대학생활에 배신감을 느꼈다. 어른들이 얘기했었던 찬란한 대학생활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대단한 행복을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개인의 일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개척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시기이다. 대학생활이 찬란한 이유는 우리에게 개척할 수 있는 방향키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방향키를 쥐어잡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항해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그 전처럼 남들이 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표류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의 방향키를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앞길이 결정된다. 10대 때는 '남들처럼' 살고 싶어서 대학생을 동경했었지만 이제는 '남들과 달리' 살 수 있기 때문에 대학생이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말씀하셨던 '하고 싶은 것'이 꼭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나도 따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가 대학생이 된지도  벌써 2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이런 글을 쓴다는게 뜬금 없기는 하다. 하지만 대학생활의 반환점을 돈 지금 이 시점이 되어서야,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대학생'으로서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충분한 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위에서 서술했던, 입학 전부터 느꼈던 대학생의 기대와 실망감 그리고 깨달음의 감정이 그 당시에는 깊고 진하게 느껴졌는데 이제 되돌아보니 작은 한 점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조금씩, 대학생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게 될 것이다. 5년이 지났을 때, 20년이 지났을 때 나는 이 시절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내가 지금 쥐고있는 방향키로 항해한 바다 위에서 지금 이 순간을 되돌아 본다면.

 

작성 : 2019.4.9 ~ 20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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